본작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게 작년 11월 8일이다. 왜 이렇게 구체적인 숫자가 나오냐면 유튜브에서 티저 트레일러 본 기록을 뒤졌거든. 그 때는 보카로P 라인업 보고 뭐? 이 라인업 뭔데? 하고 어이없어 하는 정도였는데 이렇게 코가 꿰일 줄은 몰랐지. 처음 나왔을 때 살까? 괜찮아 보이는데? 하고 판정만 해 두고 4년을 미루다가 올해에야 산 사일런트 위치도 그렇고 뭔가 괜찮은데 미루다가 피 보는 일이 자꾸 생기는 느낌이네.
게이밍 전봇대라니 머리털 나고 생전 처음 듣는 단어조합인데스케도.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행이야. 혹시 이 게이밍 전봇대를 후시가 구전해주는 과정에서 대나무가 된 걸까. 그러면 사실 게이밍 전봇대야말로 근본 중의 근본인 걸까. 나 갑자기 뇌 아파.
후반 야치요가 회상을 하던 중, 화면 상으로 지나가는 장면들. NIFTY-Serve, 개인 홈페이지, 2ch가 차례대로 배경처럼 흘러가는 장면이 있다. 정말 인상 깊었던 파트. 달 너머에서 무언가가, 월인이나 정보생명체들이 우리의 거대한 세상을 지켜보고 있다면, 그 중 딱 하나, 이 제멋대로인 달나라 공주님이 통신회선 속 우리의 작은 세상에 뛰어들어 긍정해 준 것만으로도...
ray MV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라고 하면 배개를 껴안은 카구야를 많이 꼽는데, 나는 아무래도 폐허 속에서 바닥없는 절망을 느끼는 표정의 그 부분이 아닐까... 싶다. 아니 인상적이라고 할까 그 시대를 지나가는 카구야 이야기 조금만 듣고 싶은데. (이 이야기 다른데서 한 뒤에 니도 참 특수하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하하, 제가 좀. (시발) )
미소녀 그려놓고 가차없이 표정 구겨버리고 망가트리는 개그 연출이 영화 시작 2분만에 바로 터지고 그 뒤로도 심심찮게 구겨버리는데, 꽤 좋다. 오히려 덕분에 캐릭터에 인간성이 붙는단 느낌이다.
히로인 분양 맹키로 마미라이 같은 걸 획책하는 우결충무브를 쳐볼까도 생각했는데 지금 나무위키 켜보니까 마미에겐 남친이 따로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애니플러스 서면점에서 초 카구야 굿즈 중에 라이 혼자만 끝까지 남아있었던 건 이유가 있었던 거지... (나빴다)
아니 근데 그러면 얼굴 제대로 나온 헤테로 커플이 없다 이 애니. 마미 남친은 얼굴도 안 나오고 이로하 아빠도 얼굴이 안 나오고... 헤테로 보고 싶으면 나가서 불량연애나 보라는거야? 뭐... 그러시죠.
최종반, 이로하가 카구야의 몸을 다시금 만들어 야치요가 카구야로서 다시 재회한다는 전개는 꽤 기시감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나 뿐 아니라 꽤 많은 사람들이 도라에몽의 IF 결말을 그린 모 유명 동인지를 떠올린 모양이다.
이 쯤에서 싸울 때 되지 않았나? 않았나? 할 때마다 안 싸우고 넘어가다 보니 n회차 넘어갈 때마다 이게 쌓여서, 감정적으론 꽤나 무거운 스토리인데도 생각보다 꽤 가벼운 맘으로 볼 수 있다는 점도 재미있는 지점이다.
일단 당장은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다시 또 돌려보다 보니 하루 몇 시간만 자고 밤샘도 밥먹듯이 하는 생활패턴으로는 이로하 얘 오래살기 글렀다는 생각도 역시 드는 게... 진짜... 젊다 못해 어리니까 저러고 버틴다 싶은 생각도 드는거지... 10년 후에는 쉬는 것도 일이랍니다 하면서 쉴 때는 쉬는 인간이 되었다는게 그나마 다행이긴 하다만... 아니 뭐 진짜 이런 생각이 들 정도라니 나도 나이 먹긴 했구나... 아 물론 전 올해도 15살입니다.
reply 라이브 장면에서의 카구야의 독백, "있잖아, 이로하 이로하가 너무 예뻐서 첫눈에 좋아하게 됐어(ねえ 彩葉 彩葉の表情(かお)がとてもきれいでさ 私すぐ好きになったんだ)가 영어 더빙판에서는 You're more beautiful than you know로 번역됐다. 처음 듣고는 아주 괜찮은 번안인데! 하고 감동도 했는데 일주일 정도 곱씹어보니까 작품을 다소 평범하게 만들어버리는 번안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함께 들고.
최후반, 후시가 보여준 8천년을 엿보고 실신한 이로하가 아침의 바다 같은 곳에서 눈을 뜬 이유는 일종의 수미상관이며 또한 선언이 아닌가 싶다. 이 공간은 초반 카구야가 처음 츠쿠요미에 로그인할 때의 그 공간, "태양이 저물고 밤이 찾아옵니다" 할 때의 그 공간으로 추정된다. 설정적으로는 기억을 엿본 이로하가 버티지 못하고 실신하자 후시 혹은 야치요가 강제로 셧다운을 시켰다가 다시 로그인을 해서 로그인 공간으로 돌아온 거라고 할 수 있을거다(바다 같은 곳에서 눈을 뜨기 직전에 로그인 내지 츠쿠요미 기동 연출이 뜨기도 하니까).
또한 스토리적으로는... 츠쿠요미란 결국 야치요=카구야가 이로하와 다시 만나기 위해 만든 공간이니, 이로하가 야치요=카구야와 재회하고 받아들이기까지 한 시점에서 츠쿠요미는 (이미 닿아서 역할을 완수했으니 더 이상 부르지 않는 Remember와 마찬가지로) 이로하와 만나기 위한 역할을 완수했으니 더 이상 필요가 없고, 그래서 처음과 달리 츠쿠요미로 들어가는 토리이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된 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태양이 저물고 밤이 찾아"온 것이 츠쿠요미이므로, 이 맥락에서 보면 밤=츠쿠요미의, 시간=역할이 끝났으므로 아침이 오는 것도 당연하다.
VR 세계에 대한 스토리의 무대로서의 역할을 다했다는 선언이란 점에선 본작과 마찬가지로 VR과 팝 컬쳐를 소재로 삼은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엔딩─전설의 사다리 걷어차기 엔딩─을 연상시키게 하는데 여기서는 훨씬 은유적으로 언급하고 있어서 이런 부분에 대한 반발이 없었던 것 같다. 그 쪽과는 스토리 전개 자체도 판이했고.
지금 시점에서 제목을 다시 읽어보면, 여러가지 한자 중에서도 굳이 초(超)라는 단어를 택한 것은, 새드엔딩이 당연한 카구야 공주 이야기를 뛰어넘어 그 너머의 해피엔딩을 거머쥠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정말이지, 내 2월 한달을 죽도록 불태운 영화였다. 아직 다 불탄 거 같진 않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