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2일 목요일

그리고 조금 더 ─ 초(超) 가구야 공주! (2)

 

꽤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하는 이야기지만 솔직히 각본 측면의 완성도는 그다지 높지않다. 그걸 무수히 많은 작화 종이로 덮어버리는 비주얼 차력쇼 영화라고 해도 된다. 아닌게 아니라 최후반 직전의 가짜 엔드카드는 스토리가 다소 급전개를 시작하는 지점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전개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다면 갑자기 작곡을 시작하더니 갑자기 야치요가 팔천년짜리 썰을 풀고 갑자기 10년 뒤가 되어 버린다고 느낄 수 있다.


비주얼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내 나름대로 영화의 소재가 된 세 가지 축을 분해해 본다면, 일본 SF, 버추얼 유튜버, 백합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산문문학인 타케토리모노가타리를 기반으로 완성도 높은 메타버스나 VR을 이식해내고 후반으로 가면 부트스트랩 패러독스를 통해 스토리 전체를 궤뚫는 축을 만들어냈다. 현실 속에 한 방울의 특이함을 섞어 Sukoshi Fushigi라는 일본 SF의 기반이 되는 후지코 F. 후지오의 철학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러한 세계관의 핵심에는 노래하고 춤추는 정체불명의 AI 유튜버 루나미 야치요가 있는데, 이는 하츠네 미쿠와 키즈나 아이를 결합시킨 듯한 사회적 포지션이다. (더불어 타케토리모노가타리의 내용을 고려해보면 타케토리모노가타리에서의 천황 포지션도 일부 가져가는 것으로 보이는데, 버추얼 유튜버의 세계에서 천황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게 니지산지의 중심인 츠키노 미토라는 것도 재밌다. 하필 츠키노 미토라는 이름. 우연일까? 아닐까? 사실 나도 반쯤 끼워맞춘 거다만.)


그리고 백합. 이게 날 미치게 만들었다. 아 진짜 돌겠네 씨.

솔직히 나름대로 백합을 퍼먹을대로 퍼먹고 다닌 입장이다 보니 백합물을 보면 만족이나 깊은 만족이나 아악진짜으흐흐흐흐 같은 건 있어도 막... 그 뭐라고 해야하냐... 거대감정에 깔려서 버둥거리며 고통받는 그런... 아니 이렇게 써 두니까 내가 무슨 매저키스트 같잖아. 아무튼 그런 건 잘 없다. 백합물 보면서 그런 감정 마지막으로 받아본 게 언제지? 꽤 까마득한데. 

처음 이걸 다 본 직후에는 음~ 꽤 만족스러웠어요~ 하고 감상문 하나 던져놓고 끝이었는데, 뭔가 이게... 그 뒤가 점점 커진다. 꽤 만족스러운 작품을 보고 나면 작품세계 밖에 날 던져두고 삶은 계속 흘러간다... 날 저 세계에 다시 들여보내다오... 하는 그런 우끼끼한 시점이 있는데 그게 뭔가 점점 커진다... 여운 같은 얌전하고 아름다운 게 아니라, 여진이나 후유증에 가깝다. 그러니까 Reply랑 ray를 끝없이 다시 돌려들으며 정신병 점점 심해지고... 

그래, ray. 이거 본 시점에서 꽤 세진 거 같다. 본편에 들어가지 않은 추가 컷들이 몽타주처럼 지나가면서 초 카구야 세계에 대한 갈구가 더 증폭되고... 후일담을 보여달라며 트위터 등지를 떠돌며 2차 창작을 뒤지고... 먹을 거 없으면 다시 본편 처음부터 보고... 유튜브 공식 채널 뒤져보고... 또 좀 모였냐 하고 2차 창작 뒤지고... 정신병은 심해지고...


이러다 정신병원에 끌려가기 전에 다시 스토리 얘기로 돌아가 보겠는데. 가짜 엔드카드 이후의 스토리 전개는 꽤 우악스럽다는 평을 할 만 하다. 게이밍 전봇대로 시작해 주변 상황에 휩쓸리는 게 주였던 이로하가 하고 싶은 것을 마침내 찾아내고 그걸 붙잡기 위해 능동적으로 이야기를 주도하기 시작하며, 그 끝에 마침내 진실에 도달한다. 이걸로 끝이 아니라, "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고 선언하며 그 너머로 달린다(이 부분을 좀 자세히 보여달란 말이다 야마시타 사악한 자야). 여러 차례 언급한 키워드인 "해피 엔딩"을, 꽤 억지스럽게 뜯어낸단 느낌이 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취향이다. 비극으로 끝나는 것도, 다시 만났으니 감사해용~도 아닌, 진짜 만족할 때까지 달린다는 그 우악스러움이. 나는 어떻게든 너와 함께 행복해져야겠다며 뛰쳐나가는 그게. 

그래서 이 억지스러움은 작품의 완성도를 낮췄을지도 모르지만, 완성도가 아닌 내가 느끼는 만족도는 정말 더없이 높아지는데 중요한 조각인 거다. 

그러니까 난 초 카구야 공주!가 스토리까지 완벽하다고 주장하진 않겠다. 딱히 그렇진 않다는 것도 (일단 머리론) 알고, 오히려 그래서 좋은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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